제주 시내 중심부에 있으며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중의 하나로, 제주목 관아 시설과 함께 있어 오랫동안 제주도를 상징하는 건물이자 제주 광장 문화의 터전이었다.
개요
관덕정은 세종(世宗) 30년(1448년)에 제주 목사 신숙청이 군사 훈련을 위해 지었다. 관덕(觀德)이란 이름은 유교 경전 《예기》 사의 편에 사자소이관성덕야(射者所以觀盛德也, 활을 쏘는 것은 높고 훌륭한 덕을 쌓는 것이다)의 대목에서 유래했다. 처음에는 3칸 건물이었지만, 이후 조선 중·후기에 여러 번 중수와 개축 과정을 거쳤다. 현재 남아있는 것은 17세기 전후에 수리된 건축 형태의 정면 5칸, 옆면 4칸의 단층 팔작지붕 양식으로 처마가 길고 건물 높이가 낮은 제주도 건축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24년(당시 도사: 마에다 요시지)에 옆으로 도로가 내면서 주변 도로에 처마가 걸린다는 이유로 15척(454.5cm)이나 되던 긴 처마의 끝부분 2척(60.6cm)이 잘려 나가는 피해를 입었다.
건물은 사방이 탁 트여 있고 처마를 받치기 위한 익공이 기둥마다 두 개씩 설치되어 있다. 해방 이후 한동안 미국공보원, 국민회가 사용하였으나 1959년 3월 9일 국보 제478호로 지정되면서 내부를 비웠다.[1]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322호로 재지정되었다. 1969년에 제10차 중수를 거친 후 그 상태를 유지하다가 2003년부터 2006년까지 대대적인 보수를 거치고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관덕정 앞 광장은 이재수의 난(1901년), 3·1절 발포사건(1946년) 등 제주 근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민군을 이끌고 제주성에 입성한 이재수는 관덕정 앞에서 평소 징세관의 하수인으로, 또는 프랑스 선교사의 위세를 업고 제주 도민을 업신여기던 자들을 색출해 3백여 명이나 처형하였다. 4.3사건 당시 제주 남로당 소속 재산(在山)유격대의 대장(장두)이었던 이덕구의 시체가 이곳 관덕정 앞에 내걸려 대중들 앞에 전시되었다.
관덕정의 현판은 신석조(辛碩祖)의 《관덕정기》(觀德亭記)에는 세종의 셋째 왕자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의 글씨로 알려져 있으나, 김상헌의 《남사록》(南槎錄)에는 선조 34년(1601년)에 그 현판이 불타 없어져서 이산해가 쓴 현판을 걸었다고 한다. 관덕정 내부 서쪽 들보에는 정조 4년(1780) 제주목사 김영수가 쓴 '탐라형승', 고종 19년(1882년) 제주방어사 박선양이 쓴 '호남제일루' 현판이 걸려 있으며, 남쪽과 북쪽 들보의 상산사호(商山四皓), 취과양주귤만교(醉過楊州橘滿轎), 적벽대첩도(赤壁大捷圖), 대수렵도(大狩獵圖), 십장생도(十長生圖) 등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