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항일연군 제1군 제6사는 백두산지구 유격구를 건설하고, 박달·박금철 등이 이끄는 갑산군 내 ‘조국광복회’소속 조직원들과 함께 압록강을 넘어 혜산진에서 20km 떨어진 보천보에 습격하여 경찰주재소·면사무소·우체국 등의 관공서와 산림보호구 등을 공격하고 격문을 살포하였다.[5][6]
1937년 6월 7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6월 4일 보천보 습격 당시 민간인 2명(성인 요리사, 일본 순사부장의 딸 2세 여아)이 사망했으며, 6월 5일 파견된 30명의 경찰추격대와 충돌하여 동북항일연군의 25명이 사망하고 30명이 부상, 일본 경찰추격대 30명 중 7명 사망, 14명의 부상자가 났으며, 전소한 총피해액은 50.000원이라고 밝혔다.[7]
독립운동가이자 조선인민군 부총참모장 이상조는 중공군으로부터 김일성 부대를 지원해주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그를 찾지못했다고 하며 북한 매체가 일본 관동군이 김일성을 잡기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은 김일성을 신격화하기 위한 북한 1인체제를 위한 날조라고 말했다.[8]
일본은 민간인 2명(일본 요릿집 주인과 순사의 딸 2세 여아)이 사망한 반면 조국광복회 조직은 이 사건으로 739명이 검거되고, 188명이 기소돼 조직이 궤멸되는 위기를 맞았다 한다.[9][10][11]
↑서재진,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의 신화화 연구Archived 2017년 4월 19일 - 웨이백 머신 (통일연구원 연구총서 2006-11 / 2006-12-26) pp.202~203 : 사실은 보천보 전투가 국내진공이라는 선전효과는 거두었지만 전투의 실질적 결과는 매우 파괴적이다. 동북항일연군이 궤멸당하는 계기가 되었다. 보천보 전투 이후 일본 관헌측은 필사적으로 토벌을 전개하였다. 장백현의 조국광복회 조직은 739명이 체포되어 거의 궤멸되었고, 김일성부대는 일본군의 집요한 추격을 당하여 ‘고난의 행군’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기광서, 1940년대 전반 소련군 88독립보병여단 내 김일성 그룹의 동향, 역사와현실 28, 1998.6, 254-291 (38 pages) p.258 : 739명이 검거되면서 조국광복회 조직은 와해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