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명
이순명(李順命, 1939년 6월 23일 ~ 1998년 7월 9일)은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이다. 상업은행 축구단의 감독을 맡았으며, 1997년부터 대한축구협회의 경기위원장을 지냈다. 선수 경력클럽동북고등학교를 거쳤으며, 1959년 국학대학에 입학하였다.[1] 이후 같은 해 육군 특무부대 축구단에 입대했으며, 직후 열린 전국축구선수권대회 당시 육군 헌병감실 축구단과의 경기에서 결승골을 성공시키는 등 팀의 우승에 기여하였다.[2] 그 뒤 방첩부대에서 제대해 금성방직 축구단으로 이적한 뒤 핵심 선수로 활약했으며,[3] 1965년 아시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 참가하는 대한민국 U-20 국가대표팀과의 경기에서 선제골을 득점하며 팀의 2-1 승리를 이끌었다.[4] 또한 그 해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추계 대회에서 대한중석 축구단과 철도청 축구단과의 경기에서 몇 차례 골을 기록하는 등의 활약을 보였으나 팀은 결승 진출에 실패했으며,[5][6] 뒤이어 열린 동북고등학교와 한양공업고등학교의 OB 올스타전에 출전하였다.[7] 이후 1966년 제일모직 축구단에 입단했으며,[8] 그 해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춘계 대회에서 육군 병참단 축구단을 상대로 결승골을 성공시키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나 팀은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9] 또한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당시 철도청 축구단과의 경기 등에서 활약했으나 팀은 결승 진출에 실패했으며,[10] 얼마 뒤 열린 야와타제철 축구단과의 '한일 축구대회'에서 박병주의 추가골을 어시스트하는 등 인상적인 활약을 보였다.[11] 그리고 1967년 치안국 축구단으로 팀을 옮겼으며, 같은 해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춘계 대회 당시 해병대 축구단과 쌍용양회 축구단과의 경기에서 잇달아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는 등 좋은 활약을 펼치며 팀의 대회 우승에 공헌하였다.[12][13] 그 뒤 1970년 상업은행 축구단 소속으로 활동했으며, 그 해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결승전에서 해병대 축구단을 상대로 결승골을 득점해 팀의 우승에 크게 기여하였다.[14] 하지만 1971년 산업은행 축구단과의 국무총리배 금융단 축구대회에서 김영호를 고의적으로 가격한 뒤 퇴장 처분을 받자 동료들과 함께 이우현 주심에게 지나치게 항의하는 모습을 보인 것으로 인해 빈축을 사기도 했으며,[15][16] 같은 해 대통령배 금융단 축구대회에서 한일은행 축구단을 상대로 득점포를 쏘아올리는 등의 활약을 보였으나 팀은 결승 진출에 실패하였다.[17] 그리고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추계 대회에서 육군 축구단을 상대로 추가골을 기록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였으나 팀은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18] 국가대표팀1959년 아시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 대한민국 U-20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참가했으며,[19] 태국과의 경기에서 선제골을 성공시켜 팀의 2-0 승리를 이끌었다.[20] 또한 일본과의 경기에서 추가골을 득점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팀의 3-2 승리를 견인했으며,[21] 팀의 대회 우승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개최된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에 참가하였고,[22] 9월 2일 싱가포르와의 경기에 출전하여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정식으로 데뷔하였다. 이후 1960년 하계 올림픽 예선 선수 후보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최종적으로 선발되지 못했으며,[23] 같은 해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 선수 선발 대회에 출전했으나 최종적으로 선발되지 못했다.[24] 그 뒤 1960년 AFC 아시안컵에 참가해 활약했으며,[25] 중화 타이베이와의 경기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선보이며 대표팀의 AFC 아시안컵 2연패에 기여하였다.[26] 그리고 일본과의 1962년 FIFA 월드컵 예선 경기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본 경기에는 나서지 못했으며,[27] 뒤이어 치러진 양팀 간 평가전에 출전하였다.[28] 이후 1961년 펼쳐진 마두레이라 EC와의 평가전에 출전해 만회골을 성공시키는 등 좋은 활약을 펼쳤으나 팀의 패배를 막지 못했고,[29][30] 그 해 개최된 세계 군인 축구 선수권 대회에 참가해 대표팀의 준우승에 일조하였다.[31] 그 뒤 1962년 스포르팅 크리스탈과의 1차 평가전에 출전했으며,[32][33] 국가대표팀의 인도네시아 원정 선수 선발 대회에 출전했으나 최종적으로 선발되지 못했다.[34] 이후 1963년 중화 타이베이와의 1964년 하계 올림픽 1차 예선 선수 후보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최종적으로 선발되지 못했으며,[35] 1964년 AFC 아시안컵에 참가해 이스라엘과의 경기에서 만회골을 넣는 등의 활약을 보였으나 대표팀은 3위를 기록하며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36] 그 뒤 1964년 국가대표 B팀으로 구성된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 선수 선발 대회에 출전했으나 최종적으로 선발되지 못했으며,[37] 1965년에는 1966년 FIFA 월드컵 예선을 앞두고 벌어진 제1차 선발전에서 소속팀의 우승에 기여하였다.[38] 그리고 제2차 선발전 후보 명단에 포함된 뒤 최종적으로 선발되었으나,[39][40] 대한축구협회 측에서 예선 불참을 결정함에 따라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41] 이후 1966년 아시안 게임 선수 후보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최종적으로 선발되지 못했으며,[42] 1967년에는 국가대표팀 상비군 명단에 포함되었다.[43] 그리고 같은 해 열린 미들섹스 원더러스 AFC와의 2차 평가전에 출전했으며,[44] 팀의 선제골에 관여하는 등 인상적인 활약을 보이며 팀의 2-0 승리에 공헌하였다.[45] 또한 1968년 하계 올림픽을 대비해 소집된 명단에 들어갔으며,[46] 1968년 AFC 아시안컵 예선에 참가하는 대표팀에 추가로 발탁되었으나 대표팀은 본선 진출에 실패하였다.[47][48]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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