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타 조지
무라타 조지(일본어: 村田 兆治, 본명: 村田 長次(동음), 1949년 11월 27일~2022년 11월 11일)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야구 지도자, 야구 해설가·평론가이다. 히로시마현 도요타군 혼고정(현: 미하라시) 출신이며 현역 시절 포지션은 투수였다. 현역 시절 도쿄 오리온스·롯데 오리온스에서 활약했으며 그의 다이나믹한 투구 폼을 ‘마사카리 투구법’(マサカリ投法)이라고 불렸다. 인물프로 입단 전프로 야구 선수가 되겠다고 다짐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에게 이끌려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 야간 경기를 관전하러 갔던 때가 계기였다. 처음으로 직접 관전한 프로 경기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흥분해 그 이후 프로 야구 선수 이후의 장래는 생각할 수 없게 됐다고 한다. 빠르고 구질이 무거운, 흔히 말하는 강속구는 천부적인 재능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였고 진학한 후쿠야마 전파 공업고등학교(현재의 긴키 대학 부속 히로시마 고등학교·중학교 후쿠야마 분교) 시절부터 스피드 건이 있으면 그 구속은 이미 152, 153 km/h를 측정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1] 히로시마 현내에서도 굴지의 투수로서 유명했다(다만 2학년 때까지는 아사노 게이시의 예비 선수였다). 그러나 당시의 히로시마 현에는 미무라 도시유키, 야마모토 가즈유키 등이 소속된 히로시마 상업 고등학교나, 1967년 하계 고시엔 대회에서 준우승을 이끈 고료 고등학교 등과 같은 강호들이 있기 때문에 고시엔 대회 출장의 비원은 이뤄지지 않았다. 프로 야구 선수 시절1967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1순위로 도쿄 오리온스에 입단, 등번호는 에이스 넘버인 ‘18’번을 희망했으나 구단 측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29’번이 됐다. 이 ‘29’번이 훗날 무라타의 대명사로 불렸다. 프로 1년째인 1968년에는 단 한 번도 승리없이 1패만 기록하여 부진에 시달렸는데 당시에는 드래프트 1순위로 계약금이 남아돌아 파친코나 마작과 같은 도박에 빠져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늦게까지 마작을 마치고 홀로 숙소에 돌아왔을 때 일과인 트레이닝을 시작하려고 하고 있던 고야마 마사아키와 우연히 마주치게 됐다. 그 때 이미 베테랑 투수였던 고야마가 젊은 자신보다도 훨씬 더 힘든 연습을 자신에게 부과하고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아 그대로 도망치듯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 후 연습 중에 고야마에게 사과하러 갔을 때 “그만한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걸 낭비하는건 아깝지 않냐”라고 질책을 받았다. 야구계를 대표하는 간판 투수에게서 질책을 받고 그것에 감명을 받은 무라타는 이후에 마치 딴 사람과 같은 연습에만 몰두하게 됐다고 한다. 젊은 시절 무라타의 롯데에는 고야마 외에도 나리타 후미오, 기타루 마사아키, 사카이 가쓰지, 가네다 도메히로 등과 같은 간판 투수들이 있어서 무라타는 그들로부터 투구 방법을 배워 나갔다. 또한 1973년부터 감독으로 취임한 가네다 마사이치로부터 컨디션 조절 방법을 배웠다. 또한 타격 연습에 있어서도 엄한 자세를 보이던 에노모토 기하치에게도 프로 야구 선수로서 영향을 받았다. 구단명을 ‘롯데 오리온스’로 변경한 프로 2년째인 1969년에 두각을 나타내며 시즌 6승(그 중 5승은 완봉)을 올렸다. 이듬해 1970년에는 퍼시픽 리그 우승을 경험했고 그 다음해인 1971년에는 가네다 마사이치의 조언을 바탕으로 투구 폼을 큰폭으로 개조하는 등 후에 무라타의 대명사가 되는 이른바 ‘마사카리 투구법’(マサカリ投法)을 완성시켰다. 그 해에 시즌 12승을 올려 선발 로테이션의 일원으로 활약해 1974년의 롯데가 일본 시리즈 정상에 올랐을 때에도 큰 활약을 보여주었다. 일본 시리즈 우승을 결정짓는 6차전에서 선발 등판해 연장 10회까지 145개의 공을 던지는 등의 활약으로 승리 투수가 되면서 팀을 일본 시리즈 정상으로 이끌었다. 1976년에는 포크볼을 습득했는데 보통 평범하지 않은 긴 손가락이 낳는 예리할 정도의 날카로운 변화는 매번 타자의 방망이가 허공을 가르게 했다. 그 해의 시즌에는 257이닝을 던져 21승(14선발승)을 올리는 것과 동시에 평균 자책점 1.82를 기록하여 최우수 평균 자책점 타이틀을 획득했고 202개의 리그 최다 탈삼진을 기록했다. 포수에게 의존하지 않고 ‘노 사인’으로 스스로 투구를 조절했기 때문에 1976년부터 1979년까지 4년 연속으로 두 자릿수 폭투를 기록했다. 1979년에는 32경기에 선발로 나와 개인 최다인 21차례 완투와 230개의 탈삼진을 기록했다. 1981년에는 개막 11연승을 장식하여 시즌 19승을 기록하는 등 다승왕 타이틀도 획득해 스즈키 게이시, 야마다 히사시, 히가시오 오사무 등과 함께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퍼시픽 리그를 대표하는 간판 투수가 됐다. 그러나 1982년에 팔꿈치에 이상이 생겨 여러 가지 치료법을 병행하였고 미야모토 무사시의 ‘오륜서’를 애독했다. 와카야마현 시라하마정의 식수원(약수터)인 쓰즈라후치에서 좌선을 하며 심야에 흰 옷을 걸치고 폭포수를 맞으며 수행을 하기도 했다. 또한 같은 해 오프 시즌에는 인기가 전혀 오르지 않는 롯데에 대한 불만으로 센트럴 리그의 인기 구단인 한신 타이거스의 이적을 지원했지만 맞교환에 필요한 인원이 정해지지 않아 결국 롯데에 잔류했다.[2] 이듬해 1983년에도 팔꿈치의 증상이 나아지지 않아 미국으로 도미해 스포츠 의학의 권위있는 학자로 알려진 프랭크 조브의 집도하에 왼팔의 힘줄을 오른쪽 팔꿈치에 이식하는 수술(토미 존 수술)을 받았다. 이후 2년 간을 재활훈련에만 전념해 1984년 시즌 종반에 복귀했다. 이듬해 1985년, 개막 이후부터 11연승을 올렸다고 하는 강렬한 부활극을 선보여 최종적으론 17승 5패의 성적으로 컴백상을 수상했고 작년에 계속되는 롯데의 정규 리그 2위에 기여했다. 이 해의 개막 이후부터 11연전 11연승 기록은 일본 프로 야구 기록이다.[3] 그 해부터 6일을 쉬고 일요일에만 등판하는 선발 로테이션을 하게끔 됐기 때문에 ‘선데이 조지’(サンデー兆治)라고도 불리게 됐다. 또한 일본 야구계에서는 오랜 세월 투수의 팔꿈치에 메스를 가하는 것은 금기시돼 있었지만 무라타의 부활에 의해 효과있는 치료법으로서 인식되게 됐다.[4][5] 1989년 5월 13일, 닛폰햄 파이터스와의 경기(야마가타 현 야구장)에서 개인 통산 200승을 달성했다. 200승에 결정적인 수단을 동원했던 4월 16일 긴테쓰 버펄로스와의 경기(가와사키 구장)에서는 연장 11회를 던져내면서 패전 투수가 됐지만 그 경기를 닛폰 TV가 경기 종료할 때까지 중계하였고 원래 《쇼텐》이 방송되는 17시 20분부터 17시 39분까지 시간대의 시청률은 그 날 밤 요미우리-다이요전을 웃도는 22.4%(간토 지구)를 기록했다(전체적으로는 10.9%).[6] 같은 해 39세의 나이로 통산 3번째의 최우수 평균 자책점 타이틀을 석권했다. 그 다음해인 1990년, 10승(9선발승)을 남기면서 자신으로서는 10번째의 두 자릿수 승리(두 자릿수 선발승 - 71년 12, 74년 11, 76년 14, 77년 12, 78년 12, 79년 17, 81년 19, 85년 17,88년 10)를 거두었다. 와카바야시 다다시 이후 역대 2번째가 되는 40대로서의 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했지만 그 해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또한 이 은퇴에 의해서 1960년대에 프로에 입문했던 선수들 모두 현역에서 은퇴했다. 그 후은퇴 후 NHK, 닛칸 스포츠에서 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했고 이후 1995년부터 1997년까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1군 투수 코치를 맡아 요시타케 신타로를 지도했다. 다만 다이에 코치로 활동하던 도중 심근 경색을 앓았기 때문에 이후 코치로 활동하지 않았다. 현재는 평론가로서의 활동 외에도 일본 전국 각지(특히 크고 작은 섬들)를 돌아 소년 야구 지도에 전념하는 한편 프로 야구 마스터스 리그 팀인 ‘도쿄 드림스’에 소속 선수로도 참가하고 있다. 2005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2007년 5월 26일, 센트럴·퍼시픽 교류전인 지바 롯데 마린스 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전에서 경기 시작 전에 열린 시구식에서 시구자로 나왔다. 이 때의 구속은 135km/h를 기록했지만 이것은 이 경기의 선발을 맡은 와타나베 슌스케의 모든 구속보다도 빠른 것이었다. 2010년 1월 2일 도쿄 돔에서 열린 ‘프로 야구 OB 올스타·애슬리트컵 센트럴·퍼시픽 대항전’에 등판, 그날 약 1개월 전에 60세가 된 직후였지만 구속 132km/h를 기록했다. 2005년 3월, 일본 프로 야구 OB 13인과 함께 나가사키현 쓰시마시에 ‘쓰시마 마사카리 드림스’(対馬まさかりドリームス)를 설립해 투수 겸 감독으로 취임했다. 팀 이름인 ‘마사카리’는 물론 현역 시절에 붙여졌던 별명에서 유래됐다. 이 팀을 이끌고 전국(특히 외딴 섬)의 소년 야구팀을 돌며 소년 야구 지도를 하고 있다. 지도에서는 꼭 팀에 소속된 초등학생 타자와 무라타와의 1대 1 대결을 펼치고 있다(무라타도 포크볼 등을 진짜로 던지고 있다). 은퇴 후 라이프워크로서 전국의 외딴 섬을 돌며 소년 야구 교실을 개최하고 있는 이유는 “일본에 있는 사람이 살고 있는 외딴 섬의 수가 자신의 통산 승수(215승)와 똑같은 정도로 존재하기 때문에”라고 저서 및 인터뷰 등에서 밝힌 바 있다. 또 2007년부터 개최되고 있는 전국 낙도 교류 중학생 야구 대회(통칭 ‘낙도 고시엔’)를 제창하고 있다. 이 대회도 무라타의 활동을 계기로 생겨난 것이기도 했다. 2013년 8월 30일의 지바 롯데 대 닛폰햄전에서 시구자로 나와 구속은 63세 나이에 135 km/h를 기록했다. 플레이 스타일무라타의 대명사인 포크볼에 대해 전 한큐 브레이브스 소속 투수였던 야마다 히사시는 “예전에 우리팀 타자에게 ‘다음은 포크볼’이라고 예고하고 실제로 포크볼을 던져 헛스윙을 하게 만들었다”라고 말했으며 또한 전 난카이 호크스의 노무라 가쓰야는 “무라타의 포크볼의 버릇은 금방 알아챘지만(노무라에 의하면 무라타가 포크볼을 던질 때는 모션이 들어가기 전에 글러브의 안을 슬쩍 보고 있었다고 한다) 알면서도 칠 수가 없었다”라고 말하는 등 그 위력에 대한 에피소드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스기시타 시게루도 “나는 일본인이 던지는 포크볼은 엄밀히 말하자면 SFF가 대부분이라고 생각했는데 무라타는 틀림없이 ‘진짜 포크볼’을 던졌었다”라고 말했다. 입단 당시 도쿄 오리온스 감독이었던 노닌 와타루는 같은 히로시마 현 출신의 무라타를 상당히 아꼈으나 속구의 위력이 떨어질 것을 우려해 포크볼 연습만큼은 금지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무라타는 노닌의 눈을 피해서 포크볼 연습을 계속하고 있었다. 우연히 그 모습을 노닌에게 들킨 적도 있었으나 “지금 던진 건 뭐야?”라고 물으면 ‘커브입니다’라고 얼버무렸다고 한다. 그 무렵 무라타의 포크볼은 컨트롤이 나빠 실전에서의 사용이 불가능했다.[7] 여기서 당시 포크볼의 명수였던 무라야마 미노루에게 가르침을 부탁했을 때 ‘24시간 동안 공을 쥐고 있어라’는 조언을 받아 이를 실천했다.[8] 손가락에 공을 끼운 상태에서 줄로 동여매고 자는 것으로, 포크볼 잡는 법을 몸에 익히려 한 것이다. 하지만 극심한 통증으로 인해 잠을 잘 수 없을 지경이 되었고 결국 한 번 시도만 해보고 두 번 다시 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포크볼 잡는 것을 깊게 하려한 나머지 집게 손가락과 중지 사이에 나이프로 짼 적도 있다. 습득한 후에도 오른손 중지와 집게 손가락 사이에 우유병이나 주문 제작한 강철로 만든 공 사이에 끼워넣기도 하고 문을 열 때 손잡이를 중지와 집게 손가락 사이에 끼워 여는 등 매일 같이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부인에 의하면 무라타가 중지와 집게 손가락으로 맥주병을 잡았을 때 부인이 떼내려고 해도 빠지지 않았다고 한다. 통산 폭투 개수 148개는 일본 기록으로, 2위(이시이 가즈히사, 115개)를 30개 이상이나 많다. 이 정도의 폭투 개수를 기록한 요인은 무라타의 포크볼이 너무나 예민했던 것도 있지만 포수와 사인을 주고 받지 않고 자기 혼자서 투구를 판단했었기 때문에 언제 포크볼이 날아 올지 포수가 예측할 수 없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한다. 무라타 자신은 이 정도의 폭투 개수에도 불구하고 폭투에 의한 실점이 매우 적기 때문에 이 기록에 아주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한다. 독특한 투구폼은 투구 동작이 길었던 탓인지 공을 잡은 손모양을 확인하기가 쉬웠다고 하여 상대 팀의 3루 코치가 무라타의 공 잡는 것을 보고 손가락으로 공을 끼우고 있었을 때는 휘파람을 불어서 타자에게 알리는 등 타자가 노리고 칠 수 있게끔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난카이 호크스의 돈 블레이저 등). 그러나 그것을 알아차린 무라타는 투구 모션 중에 직구에서 포크볼, 포크볼에서 직구로 공 잡는 손을 자유자재로 바꾸는 투구법을 고안하여 휘파람 작전을 봉쇄하였다. 선발 로테이션 투수로서의 기용이 많았지만 속구와 포크볼을 살리기 위해 감독인 가네다 마사이치의 의향에 따라 두 차례 정도 구원 투수진으로 갔던 적도 있다. 선수 생활 말기에도 한 차례만 구원으로 가서 그 후 다시 선발로 돌아왔지만 본인은 이것에 대해 “그것은 내 주의주장보다도 허벅지 등 하반신이 등판 간격이 짧은 구원 투수에게는 따라오지 못했기 때문에 선발로 돌아왔다”라고 말했다. 본인도 선발 완투에 대한 강한 고집이 은퇴의 이유로 이 같은 고집을 플레이에서 이루지 못하게 된 것을 꼽았다. 은퇴 후에도 좌우명은 ‘인생 선발 완투’이며, 사인에도 써 넣기도 했다.[9] 오랫동안 상대 역할을 맡은 하카마다 히데토시가 신인 시절 무라타는 “1아웃, 주자 만루. 이 때 확실히 막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은가?”라고 물었다. 하카마다는 망설임 없이 “병살입니다”라고 대답했지만 “그럼, 그 다음은?”이라고 물어와 대답하는데는 난처했다. 무라타는 웃으면서 “가장 좋은 것은 삼진이다. 병살은 실책이 있을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무라타가 탈삼진을 고집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일화이다. 에피소드
상세 정보출신 학교
선수 경력
지도자·기타 경력
수상·타이틀 경력타이틀
수상
개인 기록첫 기록
기록 달성 경력
기타
등번호
연도별 투수 성적
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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