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향교
제주향교(濟州鄕校)는 대한민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1동에 있는 향교이다. 1971년 8월 26일 제주특별자치도의 유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었다. 원래는 관덕정(觀德亭) 동쪽 1리(400m) 되는 곳의 향교전(鄕校田)에 처음 지어졌던 것을 가락천 동쪽 고령밭과 광양 등 다섯 번의 이건(移建)을 거쳐 여러 차례 재건을 반복하다 순조 27년(1827년) 당시의 제주목사 이행교가 최종적으로 옮겨지은 곳, 바로 지금의 향교 위치인 제주중학교 옆에 자리를 잡았다. 연혁조선 태조(太祖) 원년(1392년)에 수도 한양에 성균관이 지어지고, 백성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전국에 향교를 설치하라는 교지가 내려짐에 따라 제주에도 향교가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태조실록》 태조 3년(1394년) 3월 27일, 제주에 교수관(敎授官)을 두고 제주 토관(土官)의 10세 이상의 자제를 입학시켜 과거에 응시하고 벼슬길에 나아갈 자격을 주자고 요청하는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의 상소에서는 "제주는 일찍이 학교를 설치하지 않았고 자제(子弟)들이 나라에 들어와 벼슬하지 않은 까닭에…"고 적고, 《신증동국여지승람》제주목조에 실린 김처례의 비문에는 "우리 태조 원년 임신에 성균관이 세워지고 세종(世宗) 17년 을묘(1435년)에 향교가 지어졌다."고 적어서 마치 태조 당시에 제주에 향교가 없었던 듯이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태종실록》에 따르면 태종 18년(1418년) 당시 이미 제주의 유생(儒生) 수는 2백여 명이었으며, 이 해 4월 11일에 예조(禮曺)에서는 제주에서의 문선왕석전제(文宣王釋奠祭) 의식과 한라산제(漢拏山祭) 의식에 대한 절목을 조정에 올리고 있어, 향교의 중심 건물이라고 할 수 있는 문묘가 이미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제주의 석전제는 각 도의 계수관(界首官)의 예에 따르고 한라산제는 나주(羅州) 금성산(錦城山)의 예에 따라 여러 사전(祀典)에 기재하고 봄 가을에 제사지내게 한 것이었으며, 7일 뒤인 4월 18일에는 제주목사의 요청에 따라 기존의 교수관 외에 따로 교수관을 제주향교와 정의(旌義) · 대정(大靜) 두 향교까지 세 곳에 더 파견하였다. 세종 17년(1435년)에 안무사로 내려온 최해산에 의해 제주향교는 중건되었고, 《대학》(大學)· 《중용》(中庸)· 《논어》(論語)· 《맹자》(孟子)· 《시경》(詩經)· 《서경》(書經)· 《예기》(禮記)· 《주역》(周易)· 《춘추》(春秋)· 《성리대전》(性理大全) 등의 책이 각 두 건씩, 《소학》(小學) 10건씩이 제주의 향교에 내려지기도 했다. 김처례가 지은 비문(碑文)에 따르면 성화(成化) 병술년, 즉 세조(世祖) 12년(1466년) 봄, 제주목사(겸 절제사) 이유(李由)가 퇴락한 향교의 모습을 보고 판관(判官) 이인충(李仁忠)과 의논하여 크게 수리하였으며, 주자(朱子)의 백록동규(白鹿洞規)를 향교의 교칙으로 내걸고 유생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중종(中宗) 12년(1517년)에는 제주목사 문계창(文繼昌)이 제주에서 벌어진 기근과 역병을 보고하면서 전라도의 미곡 및 당약재(唐藥材) 지원과 함께, 향교의 책이 오래되어 너덜너덜해졌으므로 《효경》(孝經) · 《소학》 및 사서(四書)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중종 31년(1536년) 제주목사 심연원이 향교의 명륜당을 개축하였다. 선조(宣祖) 15년(1582년) 제주목사 김태정이 가락천 동쪽의 고령전으로 이전하였다. 선조 23년(1590년) 역병이 제주를 휩쓸고 간 뒤로 해마다 제주에는 흉년이 들었다. 임진왜란까지 겪고 난 뒤인 선조 33년(1600년)까지 제주 백성의 2/3가 사망하는 등 인구의 급격한 감소로 군역(軍役)에 올릴 장정이 모자라게 되자, 제주목사 성윤문(成允文)은 향교 교생을 모아 학문을 시험하여 순(純)이나 조(粗) 이상은 교생의 원액(元額)에 충원시키고, 제주목과 정의현에서 불통(不通), 즉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교생 108명을 가려 군역에 충당하게 하기도 했다(《선조실록》). 현종(顯宗) 9년(1668년) 제주목사 이인이 향교를 예전의 자리로 다시 옮겼으며, 경종 4년(1724년) 향교에 화재가 일어나 향교 건물들이 소실되자 제주목사 신유익은 다시 가락천 동쪽의 예전 자리로 이전하였다. 영조 17년(1754년) 목사 조명집이 향교의 대성전을 중수하였고, 순조 27년(1827년) 제주목사 이행교가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한편 영조 때의 제주향교는 한양의 성균관과 같은 대설위(大說位)로서의 규모와 기능으로 성장해 있었고, 영조(英祖) 50년(1774년) 제주 유생들이 서울의 성균관과 같은 계성사를 제주향교에도 지어줄 것을 연명으로 순찰어사에게 청원하기도 했으며, 이것은 80년이 지난 철종 5년(1854년)에야 결실을 보게 되었다. 갑오개혁 이후 향교의 학교로서의 기능은 사라졌다. 일제 시대 총독부는 제주의 향교를 없애려 했지만 유생들의 반대로 끝내 향교를 없애지 못했다. 1925년 7월 12일 제주 지역 유지 20명 등이 제주향교에서 제주축구단을 조직하였다(동아일보). 오늘날에는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낼 때 이용되고 있다. 또한 제주향교 인근 제주제일고등학교 후정에는 처음 향교가 세워졌을 때에 세운 근학비(勤學碑)도 있었으며, 한국에 단 하나밖에 없는 근학비로써 중요한 가치가 있었지만 비바람에 글자는 마모되어 단 하나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고 1968년 1월 24일자 경향신문은 보도하고 있다. 또한 1975년에는 제주도향교재단 소유의 북제주군 구좌면 한동리 서동마을 면적 3ha의 땅이 재단측의 재단매각 경쟁입찰 실시로 3백 년 가까이 살아온 고향 마을을 떠날 처지에 놓인 주민들이 재단측에 마을 주민들의 현 실정을 인정해 일반경매를 중지하고 적정 시세로 주민들에게 양도해주거나 현재와 같은 대지 평당 9원씩의 임대료를 지불하고 살아갈 수 있게 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2월 27일에 실시된 해당 마을의 토지매각 일반경쟁 입찰에는 제주향교 전 재단이사장 김 모씨 한 명만이 응하여 유찰되었고, 재단측은 3월 초순에 재입찰을 강행하였다. 한편 제주도 감사과는 3월 5일 해당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에 나서서, 당시 향교재단 이사장 강두환이 제주도 문화공보실에 재산 매각을 승인 신청한 것을 도에서는 주민 동의와 향후 대책 등에 대한 세밀한 검토 없이 승인했음이 밝혀져, 승인 경위를 조사한 한편으로 이승택 당시 제주도지사가 제주향교재단에 대한 경매를 보류하고 현지 주민들에게는 적정가격으로 매도하도록 조치중임을 언론에 밝히기도 하였다(경향신문). 주요 시설
같이 보기각주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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